본문 바로가기
Essay/일상

들꽃 이야기 - 4년차 동원 예비군을 마치며

by yellowmango 2024. 6. 26.

  바람에 들꽃향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계란프라이를 닮은 이름 모를 들꽃이 허리 높이까지 무성하게 자라서 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크기를 보면 계란프라이가 아니라 메추리알프라이를 닮았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위치상으로 볼 때, 내 코가 꽃향기를 맡은 것이 맞다면, 분명 저들이 풍기는 향기가 분명하다. 이 꽃은 5월에서 6월 사이에 자주 봤던 꽃이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이웃 대학교로 넘어가는 샛길에 듬성듬성 펴 있었고, 한창 군복무 현역 때 비행단 내부의 식물을 관찰하던 시기에도 자주 봤었다. 예전에 이름을 찾아봤던 기억이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나 자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 꽃이 기분 좋은 은은한 향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이들이 가진 향기가 너무 은근해서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다음에 이 꽃을 다시 본다면 이름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조그마한 향기를 품고 있음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들판에 핀 꽃을 본 탓인지, 군복무를 하던 시절 상번, 하번(각각 근무 투입/ 근무 종료, 공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을 하던 길이 생각났다. 내가 복무할 때 근무를 했던 곳은 비행단 내부의 관제탑 1층이었다. 숙소에서 관제탑 1층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는 비행기를 보관하는 격납고가, 왼쪽에는 무언가를 보관하는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도로와 인도를 제외하면 모두 잡초와 들꽃이 뒤덮고 있는 땅이었다. 비행단에서는 전투기를 비롯한 비행기가 언제든 뜰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관리를 한다. 그중 하나로, 무성한 잡초와 들꽃이 뒤덮고 있는 땅의 생명력을 먹고 자라난 벌레를 사냥하러 모여든 새들이 전투기와 충돌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잡초와 들꽃이 어느 정도 자라면 반드시 제초를 한다. 그러면 새들이 모여들 원인 자체가 제거되고 먹이를 위해 새들이 모여들지는 않게 된다. 제초제를 쓰거나 아예 풀이 자랄 수 없도록 땅을 덮어버리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이제는 들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제초를 하는 편이 더 나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행단에서 주기적으로 제초를 하는 방법을 선택해 주어서 나는 매일같이 상하번을 할 때 잘린 풀들 사이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다른 풀을 관찰하며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6월인 이맘때쯤 상하번을 하던 길을 떠올려보면, 아까 보았던 미세한 향기를 품은 이름 모를 들꽃이 아스팔트를 제외한 땅을 모두 뒤덮고 있던 토끼풀 사이에 듬성듬성 나와있던 장면이 그려진다. 나는 이 풍경을 좋아해서 천천히 걸으며 감상했고, 마음에 드는 모양의 토끼풀꽃이 보이면 쪼그려 앉아서 질릴 때까지 관찰하고 다시 일어서곤 했다. 다른 날보다 토끼풀의 매력에 더 빠졌던 날에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상번해서 하번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던 사람에게 늦게 왔다고 핀잔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초록색 이슬 같은 풀잎 세 방울이 둥그렇게 모여있고 풀잎에 토끼털이 묻은 듯한 흰 무늬가 그려져 있어 토끼풀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토끼풀의 진가는 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도 토끼풀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흰색과 자주색의 토끼풀꽃이 있고 토끼풀이 일정 수준의 군락을 이루면 꿀벌이 찾아와서 자주 앉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나는 특히 시든 꽃잎 하나 없는 통통한 토끼 꼬리를 닮은 새하얀 토끼풀꽃에 꿀벌이 앉은 모습을 좋아하는데, 이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음에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군대에 있었을 때에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못했고, 전역하고 나서는 내가 원하는 모양의 귀여운 토끼풀꽃이 무성하게 피어있는 토끼풀 군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시든 꽃잎 없는 통통한 토끼꼬리 위에 꿀벌이 앉은 순간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어 했다.

 

  상하번길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자 바쁜 일상에 밀려 잊혀 있었던 애틋한 순간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같이 생활관을 쓰던 사람들끼리 함께 쉬는 날 BX에 가서 먹어보지 못했던 냉동식품을 사서 나눠 먹은 기억, 그 옆에 있던 동전노래방 부스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다 부스를 가득 채운 땀내와 열기를 못 참고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다음 노래를 불렀던 기억, 관제탑 1층에서 혼자 근무를 섰을 때 철창 너머로 파란 하늘에 떠내려가는 뭉게구름 보며 저 구름을 따라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전역까지 남은 날을 새었던 기억, 매일 같이 점호 시간에 서로를 놀리며 별것도 아닌 일로 배가 아프게 웃었던 기억, 휴가에서 복귀하고 생활관으로 들어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침울해하고 있을 때 휴가 때 새로운 여자를 만났는지 생활관 사람들이 득달같이 물어봤던 기억. 말하자면 끝도 없다. 군 복무를 하던 현역 시절에는 그토록 그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고, 이후에도 똑같이 그 순간들을 증오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역한 지 4년 정도 지난 지금은 군 복무를 했던 그 시간이 애틋하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그 시절의 내가 애틋한 걸까, 아니면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이 너무 행복했던 것일까.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곧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1년이 된다. 아직 회사 내에서 어떤 업무를 책임지고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자리를 잡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며 나름대로 나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벌이고 있는 일은 이제 시작 단계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은 그대로이다. 나를 믿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억여행이라고 할만한 예비군을 다녀오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나는 상하번 길에 피어난 소박한 들꽃을 좋아했고, 정말 사소한 순간을 오롯이 행복하게 느꼈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시간을 애틋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자리 잡고 성과를 내고 인정받는 것도 살기 위해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에 집중한다고 내가 어떻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었는지 잠시 까먹고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나면 불안해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소중히 음미하고 애틋하게 기억하자. 아무리 잘라내도 해맑게 피어났던, 내가 좋아했던 그 들꽃을 닮아 살아가야겠다.

  

  

댓글